윤리와 지식의 끝나지 않은 불협화음이 대한민국을 들끓게 하고 있습니다. 본래 지식 자체는
모든 판단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윤리는 어쩌면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됩니다. 현대사회의 막강한 힘은 모두 과학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난 300년동안 실로 엄청난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엄청난 파괴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갈릴레이가 과학적으로 증명하며 독배를 마신 사건은 윤리와 지식의 싸움중에 가장 극적이고도 우매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치
유대율법의 허구성을 십자가로 증명한 예수처럼 윤리는 지식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앙시앙레짐이었습니다. 중세의 과학자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연금술이 아직도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 있듯이 종의 기원 또한 아직도 미지의 세계임에도 인간의 탐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나방이
불빛을 보고 몰려들 듯이 말입니다. 그때마다 과학자들은 심장을 옥죄는 듯한 갈등을 느꼈고 앞으로도 느낄 것입니다.
구약성서를 굳게 믿고 있는 과학자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화약을 발명해 지구 개발과 전쟁의 폭발력 증가에 혁혁한
공을 세운 노벨은 그 발명품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 아닌 속설이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있게한
아인슈타인도 그의 연구의 부산물에 괴로워했으며 우주로 비행하며 찬란한 우주 공간의 광막한 아름다움을 접한 N.암스트롱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과학은 창조의 범주에 있으며 인간의 인식론은 바벨탑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웅변해야 안심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과학적 관심은 언제나 생명의 기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생명은 창조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져 진화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푼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月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현대 생물학, 유전학의 강령입니다. 왓슨과 크릭의 DNA 단백질
구조와 2중다선형의 수수께끼를 밝혀낸 사건은 생명의 기원을 당장이라도 밝혀줄듯한 흥분거리였습니다. 이후 분자생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현대과학의 모든 분야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려하면서도 먹을 수 밖에 없는 GMO. 즉 유전자 변형식물도 다 이 덕분(?)입니다.
시험관 아기는 이미 고전적인 일화가 되었고 생체복제에 이어 세포복제로 그것도 月不芽의 줄기세포의 복제를 말하고 있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그 결과의 성취여부(진위여부)를 떠나 그 진보성이 月不芽에까지 다가갔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황박사는 배아줄기세포의 복제과정을 논문으로 썼고 이를 사이언스지가 게재하게 되면서 사건은 폭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배아줄기세포의 복제는 DNA 조작술의 대미일수도 있습니다. 마치 달나라를 갔다와서는 더 이상 의미없이 달나라를 갈 필요를 못느낀 것처럼
배아줄기세포 복제가 확실한 것이라면 DNA연구는 또다른 미지의 분야를 개척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이언스지의 게재가 모든 것을 공인받은
것처럼 국내의 모든 언론이 일제히 찬송가를 부르고 게다가 대통령의 비밀방문과 국가예산의 막대한 지원까지 황우석 신드롬은 이렇게 가을 하늘의
애드벌룬처럼 높이높이 올라갔습니다. 연구원들의 눈빛 하나하나에 국민들은 자랑스러운 눈으로 화답했고 황우석 박사는 “연구좀 하게 나좀
내버려 두세요”라며 어느 정치인보다 더 많은 사회적 활동을 했습니다. 엄밀히 미완의 줄기세포 연구는 난자제공 과정이 뜻하지 않은
윤리논쟁의 불씨가 되었고 처음에는 윤리논쟁으로 끝날 줄 알았던 대중들은 진위논쟁으로 옮겨붙자 처음의 광적인 지지를 서서히 철회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애국주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언론의 무지함에서 온 헤프닝이라고도 합니다. ‘국익이냐 진실이냐’라는 대치될 수
없는 명제가 아무런 탐구없이 마치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망나니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이젠 ‘영웅’의 성취가 진실이냐 허구냐로
변질되었습니다. 만약 황우석 박사의 논문이 미약한 초기 단계라면 대중들은 돌변하여 조소와 비난을 할지도 모릅니다. 황우석 박사의 의도와는
달리 부풀려졌지만 언론과 광분한 여론이 휩쓸고 간 황량한 들판에 홀로 남는 것은 황우석 박사뿐일 것입니다. 누가 그 외로움을 알겠습니까?
생물은 복제 즉 자기복제를 그 속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복제를 하지 않으면 생물이 아니라는 역도 성립합니다. 그
복제에는 유전이 핵심 keyword이고 그 유전에는 DNA의 이중나선형 구조가 작용하고 있다고 증명했습니다. 생명의 최초의 시작은
月丕라고 하며 이때 처음 생성되는 줄기세포의 복제는 생명의 기원을 엿볼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세계는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사람이었기에 윤리논쟁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직 창조론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최소한 생명의 창조가 우연이라는 확실한
검증이 있기까지는 말입니다. 사실 인간은 터럭 하나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을 밝히려는 것도 그
우연적 요소를 객관화시키고 싶은 것일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진화론으로 모범답안을 만들고 교회에서는 창조론으로 진화론으로 흐트러진 믿음을
담금질해야 했던 사춘기적 믿음이 우리 사회의 이분법이고 이 가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부조리가 인간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사랑,
예술 그리고 윤리까지도 이 이원론의 굴레 속에 있습니다.
이제 좀 차분해졌으면 합니다. 사실 비과학적인 사람이 흥분하길
좋아합니다. 가장 과학적인 사안이 가장 비과학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요즘의 현상을 보면서 갈릴레이에게 독배를 권하는 군중들이나
십자가상의 예수를 향해 온갖 조롱과 침을 뱉던 군중들이 수준차이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논문은 그냥
한 과학자의 의미있는 논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증명이 된 것도 있고 그저 가설에 그치는 것도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시각은 바로 이런 눈으로 대한민국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언론과 그에 따른 열광과 냉소에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 지식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도 진화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생물체가 자기 복제를 하면서 사랑, 이해, 용서, 이성, 존중....의 가치적 정보는 삭제되는지 조물주는 왜 그렇게 창조했는지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가치들도 복제되어 축적될까봐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처음처럼 자신의 운명을 살도록 설계된 깊은 뜻은 아닐까
위안도 해봅니다.
황우석 박사 논란을 지켜보면서 책꽂이에서 20년전 국내에 출판된 책 한권을 훑어 보았습니다. 프랑스 생물학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자크. L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말미에 모노 교수는 이렇게 지식과 윤리에 대해 독백합니다.
“지식의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의 지식’이기도 하다. 즉 생물 존재의 충동, 정념(情念), 요청, 한계에 대한 지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속에 동물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동물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이상스러운 것이며 바로 그 이상스러움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생물권과 사상의 왕국이라는 두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하여 있으며 이 찢길 듯한 이원론 때문에 가책을 받으며 번민하고 있지만 동시에
풍부해지고 있다”
당신은 우연 속에 내재된 필연을 찾습니까? 아니면 필연이 만든 장식품 우연을 믿고 있습니까? 이
해답을 찾을 때까지 좀 차분해지면 어떻겠습니까?
2005년 12월 첫째주 월요일 아침에 한탄강가에서 이 철 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