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많이 좋아하는 내 후배이자 선배인 이사람의 삶이 아름 답습니다.
그가 쓴 글을 이곳에 옮겨 봅니다
프롤로그
퇴근길에
지하철을 타려고 발걸음을 한발 두발 옮길 때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히죽 히죽 웃으며 걸을라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인 양 힐끗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간다.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끼는 때라고나 할까. 요즘처럼 이렇게 기분 좋아 본적은 없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1.
먼저
올해 서울시청에 입성한 것을 빼놓을 수 없겠다. 서울시청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서울시청은 서울시에 사는 천 200만 인구의 삶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공무원 2만명이 근무하는 곳이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오세훈․강금실 라이벌전이 벌어진 결과 오세훈이 차지하여
서울시장으로 앉아 있는, 같은 건물에 있는 곳이다. 그
시청에 입성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에 버금간다.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어렵다. 아니 전혀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먼저
서울시청에 들어가려면 먼저 9급 공채, 7급 공채, 행정고시에 패스해야 한다. 고시는 말만 들어도 어렵다. 요즘은 7급도, 9급도 모두 다
고시다. 지난
봄 서울시 9급 신규채용에 행정직이 1,000명 모집에 12만여 명이 지원했다. 줄잡아 120대 1이다. 물론
내가 입사할 때는 그런 어려운 경쟁률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그렇다. 거기에서
합격된 사람들은 모두다 동사무소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면서 구청과 동사무소를 번갈아 근무하게 된다. 재수없으면 평생 동직원으로 근무하는 사람도
많다. 서울시청에서는
매년 2차례 각 구청에 있는 직원을 대상으로 제2의 입사시험을 치른다. 물론 필기시험보다 어렵다는 다면평가 면접시험이다. 나는 여기서 합격을
했다. 동사무소와
구청을 오가며 근무한지 16년, 아직도 시청에 들어오고 싶어 백방으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나보다 시간을 많이 앞당긴 사람들도 있다.
기회를 잘 잡은 경우다. 공무원은
철저한 신분제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카스트는
대체로 4개의 계급으로 분류된다. 최상층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귀족
또는 무사), 바이샤(평민
또는 상인), 최하층은
수드라(노동자) 등이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최상의 브라만 계급에 해당되는 경우가 시장이나 구청장처럼 선거에 의해 국민이 뽑아준 시장과 구청장이다. 두
번째 상류층이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사무관부터 시작하는 우리사회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모든 관공서의 흐름을 주도하고 나간다.
옛날로 말하면 과거급제다. 수석합격자는 암행어사가 된다. 공무원의 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무관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족보에도 올라간다. 顯考
地方行政事務官 府君 神位 최하층으로
수드라 계급으로 기능직이 있다. 기능직의 종류는 엄청 다양하다. 서기 보조부터 시작해서 건설, 토목, 전기, 기계, 청소부까지 없는 종류가
없다. 심지어는 카센타도 있다. ‘카센타 공무원’ 들어봤는가? 이들은 한번 입사하면 퇴직할 때까지 그 일만 하다가 퇴직한다. 진급이 있지만
진급은 월급 외엔 신분의 변화가 없다. 고위 공직자가 아니면 어떠랴. 신분상승의 문제는 세상사는 것과 별개인 듯 하다. 고위공직자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오히려 세상사는 따뜻한 정을 느낀다. 내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를 따져보았다. 서울시청 근무하는 직원 2만 명중 나는 줄잡아 2천등 정도 되겠다. 상위 10%정도 된다. 학교 다닐 때도
맨날 30등에서 맴돌았는데 서울시청에서 서열 10%정도에 든다니 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다. 2.
그
거대한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임대주택 입주희망자를 모집했다. 거기에서 내가 3명 모집에 24명이 신청해서 3번째로 당첨됐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임대주택은
이렇다. 결혼 후 지금까지 무주택인 서울시청 공무원 중에서 경력과 가정형편을 고려해서 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
10년이 아직 안된 사람들은 결혼 초기이기 때문에 신청조차 하지 않는다. 보통 공무원들은 입사 후 10년~15년 정도면 집을 산다. 그 때까지도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수혜를 주기위한 제도이다. 지금의 경력과 주변 여건이 내가 당첨 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다.
3.
지난
4월 국립국어원에서 국어교육을 1주간 받았다. 우리가 생활해 나가면서 알아야할 우리말의 상식을 종합해서 1주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교육은
아무나 듣지 않는다. 다들 업무와 관련된, 진급과 관련된 교육만 들으려 하지 국어교육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특이하게도 이 강의를
듣고 너무 행복하다. 이런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한다. 나는
방통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남들은 4년 만에 하는 졸업을 나는 6년 만에 졸업했다. 보통은 졸업하면 끝이지만 나는 그 변변치 못한 실력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문학기행반에서 시작하여 중문학과 스터디에서 국어강의를 도맡았다. 실력은
없지만 강의를 하는 순간은 너무나 신바람 나고 가슴이 뿌듯하다. 나처럼 많이 아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우쭐거려진다. 사실 그렇다 최소한 그만큼은
노력하니까. 4.
지난주에
한자1급 자격시험을 봤다. 한자 자격시험은 보통 4개 사단법인체에서 치러진다. 한국외국어평가원, 한자능력검정회, 대한검정회, 한자교육진흥회가 그
곳이다. 실력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전자가 제일 어렵고 후자로 갈수로 점점 쉬워진다. 한자
8급부터 시작하여 4급까지는 초등학생들용 교양급수이다. 3급은
읽기 1,817자, 쓰기 1000자, 2급은
읽기 2,335자, 쓰기 1,818자, 1급은
읽기 3,500자, 쓰기 2,000자 수준이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한자에 흥미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고 3때 1,800자 정도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3급
수준이다. 나는
내가 2급 실력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작년에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2급 시험을 3번이나 치렀다. 모두다 달랑달랑 떨어졌다. 이왕 시작한 것
올해 2급 공부를 시작했다. 4곳 법인의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한자2급 자격증이 4개나 된다. 이 정도 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1급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지난주와 다음달, 나는 한자1급 자격증을 4개나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한자 공부를 왜 하냐고 한다. 심지어는 매일 같이 사는 내 색시까지도 쓸데없는 공부에 밤잠 설친다고 성화다. 그러나 이 세상에 쓸모 있는 공부는
어떤 것인가. 영어는 써먹지도 못하면서 왜 6년 동안 공부했던가. 한자를
공부해보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써왔단 무수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나의 새로운 언어의 장벽을 뚫고 넘는다. 알고 쓰는 단어와
모르고 쓰는 단어의 차이, 대화의 질이 달라진다. 이제는 한자 공부하는 방법도 강의할 수 있겠다. 5.
나는
94년부터 문학기행을 시작했다. 이제는 문학기행 가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동문회에서 문학기행을 1년에 몇 차례씩 준비하곤 한다.
문학기행 계획을 세워 회의를 소집하면 말들도 많고 의견도 분분하다. 하자고 해놓고 막상 하려고 보면 준비하는 사람은 몇 사람이 도맡아서 하게
된다. 기행
가기전 가장 필수적인 준비가 기행코스와 숙소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다. 답사는 그래도 성탁이가 도맡아서 해주고 있지만 숙소를 잡는 것은 어디가나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조금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비싸고, 가격이 싸다 싶으면 숙소가 엉망이고. 거기에 토론장까지 갖추어야 하니 추가요금이 또
붙는다. 숙박비가 예전 같지가 않다. 온종일도 아니고 밤에 잠깐 눈만 붙이고 오는데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강사섭외는
내 몫이다. 여기저기 학위논문과 책의 서평에서 연구한 교수들의 자료를 찾아 기행지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몇몇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강의
가능여부를 의사타진 해보고 강사가 시답지 않게 생각하면 맥이 빠진다. 다행이 우리 기행에 호감을 갖고 강의 약속을 받아내면 마치 영업사원이
오다(order)를 따냈을 때처럼 기분이 흥분된다. 50여
페이지의 기행보를 만들 때 오타도 많고, 편집할 것도 많다.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서 교정볼라치면 눈이 돌아간다. 어쩌다 실수로 몇 시간동안
고생했던 작업이 다 지워졌을 때 나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이런 것 해야 하나 싶다. 그러나 책으로 나온 것을
보면 또 마음이 달라진다. 나의 또 하나의 작품이다. 흡족하다. 명찰을
만들 때가 나는 가장 즐겁다. 목걸이 명찰을 새로 산 이후로 더더욱 그렇다. 분홍색을 누구한테 걸어줄까? 어린이들은 밝은 색으로 걸어줘야지.
신입생들은 산뜻한 색을 걸어줘야지. 푸른색은 학생들한테 걸어줘야지. 동문들은 헌 것을 걸어줘도 기분 나쁘지 않겠지. 명찰을
나눠줄 때처럼 기분이 좋아 본적은 없다. 예쁘게 써 온 명찰이 주인 없이 가방에서 그냥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처럼 허망할 때가 없다. 다른
사람까지 못 오게 예약까지 해놓고 안 와버리는 사람이 제일 밉다. 나는
기행때 차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제2의 직업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 즐거움 때문에 오히려 기행이 기다려진다. 한 명씩 한 명씩 우리 기행반
식구들을 소개할 때면 너무나 정겹고 반갑다. 96년
편집부장 맡을 때부터 진행을 했었는데 옛날에는 수줍어서 말도 못하고 썰렁했다. 요즘은 그래도 제법 웃어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많이
발전됐단다. 사실 나를 이 정도로 키워준 곳이 바로 문학기행반이다. 그것이 내가 문학기행반을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차에
올라 마이크 잡기까지는 긴장의 연속이다. 시그널멘트로 어떤 말을 끄집어내야 어울릴까.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소개를 잘할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기행을 갈까. 행여 말실수해서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고민은 마이크를 잡는 순간 어느샌가 말끔히 사라진다. 눈앞에서
쳐다보는 눈빛들에서 애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제발표는
나의 문학적 지식을 조금이나마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한 꼭지씩을 맡는다. 그래야 이번 문학기행을 준비하고
남는 것이 하나라도 생기리라. 이제는 그래도 옛날보다 문학적 지식이 많이 쌓였단다. 발표력도 많이 늘었다. 주로 친일 관련 주제를
발표를 하게 되는데 이제는 친일 문학이 나의 부전공이 되어 버렸다. 문학기행으로 알게 된 친일작가들은 이제 나의 가장 큰 소재거리이다.
토론은
문학기행에서 가장 중요한 꽃이다. 주제발표에서 토론발표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매끄럽게 진행해야 될까. 주제발표는 누가 하는 것이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식상하지 않고 신선한 토론이 될까. 어떻게 하면 재학생들이 토론에 흥미를 갖고 참여하게
될까. 토론시간을
무시하고 등한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불난다. 토론도 참여하지 않을 거면 문학기행의 주목적을 상실한 때문이다. 기행
때 관광지 입장료는 가는데 마다 돈이다. 나는 이 돈이 가장 아깝다. 그러나 몇 천원 아깝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족하나마 다
보여 주는 것이 기행의 질을 보다더 윤택하게 할수있기에. 이번기행에서도 적자폭은 거의 다 이 입장료에서 생긴다. 올라올
때 차안에서 발표하는 소감은 모두들 만족과 즐거움과 극찬일색이다. 빈말인 것도 같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다음 기행에 꼭 오겠단다. 이야기는 그렇게 하지만 막상 다음 기행때 가보면 그 때 그 사람들 그 약속 지키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물론 바빠서 일께다. 그래도 다행이다. 한 차씩은 꼭 채워주니 말이다. 기행계획을
세워 준비할 때는 어렵고 짜증이 난다. 여기저기 선배들한테 투정도 해본다. 혹자는 한번 기행에서 관심을 끊고 빠져보라고 위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곤욕이다.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다. 내게 제일 좋아하는 즐거움이요, 내 생활의 활력소인
문학기행의 기회를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다. 힘들지만
내가 문학기행을 준비함으로써 얻은 씨너지 효과가 나에겐 더 크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나를 기분 좋은 인연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있어 아직까지 웃음의 여운이 남아있다. 에필로그
나에겐
아들만 두 놈이 있다. 여섯 살짜리 장현이와 네 살짜리 예현이다. 까무잡잡한 장현이와 뽀얀살이 너무 이쁜 예현이는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지만
너무나 비교된다. 우리
예현이를 데리고 길을 걸어갈 때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지하철 안에서 두 형제를 보고 한마디씩 안건넨 사람이 없다. 보통사람과
다르게 아이가 눈에 확 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고 지나간다. 정말 이쁘다고, 어떤 사람들은 계집앤 줄 알았다고
신기하단다. 내가 봐도 신기하다. 나에게 이런 자식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장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동맥 협착으로 심장병을 앓고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둘째아들 예현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을 못하고 버벅거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 아들이 장애아인줄만 알았다. 요즘 둘째아들 놈 예현이의 나불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어휘들은 나의 행복을 더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준다. 나에겐
아직까지 차가 없다. 차를 굴릴 형편도 못된다. 그러나 나는 매일 퇴근시간이 기다려진다. 매일 매일 퇴근시간만 되면 장현이와 예현이가 어김없이
노원역에서 유모차를 타고 아버지를 기다린다. 나는 노원역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유모차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나를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하루의 피로를 고드름처럼 녹아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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