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크랩

눈에 띄는기사-장준하 죽음...

한성제피로스 2007. 5. 26. 14:13
장준하 죽음, 저 태극기는 알고 있었다
2007년 05월 23일 [8면] 기고자 : 김용옥
1932년 4월 26일 매헌 윤봉길은 태극기 앞에서 우렁차게 선서문을 낭독했다. 이 태극기는 장준하가 보관하고 있다가 사망하기 이틀 전 이화대학교에 기증했다.
1977년 늦가을 나는 하버드대학에 갓 입학한 대학원 학생이었다. 때마침 함석헌 선생이 국제퀘이커교도단체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이 되었고, 후보자로서 세계 순방길에 올랐다가 하버드대학 강연차 보스턴에 오셨을 때, 내 집에서 며칠을 유숙하셨다. 케임브리지 어빙스트리트의 낙엽이 휘날리는 가을길을 함 선생님을 모시고 한가롭게 산보하던 추억이 아련하다. 그때 함 선생께서는 내게 장준하의 죽음에 관한 당신의 목격담을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면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필라델피아에 있는 내 친구에게 전했다. 그 친구가 바로 민주당 의원을 지낸 바 있고 '김형욱 회고록'을 쓴 김경재였다.

나는 하버드대학에 가기 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한 학기를 머물렀다. 김경재는 그 대학 정치학과 박사반 학생이었는데 재미 반독재투쟁을 리드하던 '독립신문'의 발행인이었다. 반골 기질이 강한 순천 사람 김경재는 당시 매우 재기발랄한 청춘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내 이야기를 '독립신문' 제1면 전면에 실었다. 언론통제가 삼엄했던 국내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장준하의문사에 관한 진술이 활자매체를 통해 공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고, 나는 그 사건에 관한 최초의 소스 제공자였다. 그 기록은 지금 미 의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영구집권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체제로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1972) 유신반대운동의 불길은 타올랐고 그 선봉에 장준하가 우뚝 서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년배로 태어난 박정희와 장준하는 상극의 인생길을 걸었다. 장준하는 사선을 뚫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투사이며 반체제의 선봉, 박정희는 대일본제국의 육군장교였고 여수.순천항명사건의 굴절을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

"75년 7월 말경이었지. 준하가 나에게 왔어. 그리고 하는 말이 어찌 황군장교 하던 사람을 종신대통령으로 모실 수 있겠느냐. 도무지 선열을 뵈올 면목이 없다는 게야. 올해는 광복 30주년이고 하니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뭔가 합시다, 이런 여운만 남기고 갔어. 그때 난 그 '뭔가'가 무엇인지 몰랐지. 그 뒤로 장 선생이 한 행동이 오묘해."

첫째, 장준하는 6.25 전쟁통에서도, 광복군 시절에 자기가 발행했던 '등불''제단' 등의 소중한 잡지자료와 일기를 다 분실했지만 가슴에 지킨 태극기가 있었다. 이 태극기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에 장준하에게 전한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들고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가기 직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결연한 맹세를 한 바로 그 태극기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획기적 분수령을 마련한 그 장쾌한 희생의 선혈을 간직한 태극기였던 것이다. 장준하는 죽기 바로 이틀 전 이 태극기와 자신이 창간.편집한 민주의 투혼, '사상계' 전질을 이화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다. 75년 8월 15일이었다. 김구가 죽기 이틀 전에 장준하에게 전했고, 장준하도 죽기 이틀 전에 이화동산에 전했다.

둘째, 죽기 일주일 전 장준하는 망우리에 있던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잔디를 베고 성묘한다. 그리고 효창동 김구 선생 묘소에 가서 큰절을 올렸다.

셋째, 그 부인 김희숙 여사는 할머니대부터 독실한 가톨릭신자 집안 사람이었고, 장준하는 일본 신학교와 한국 신학대학을 나온 개신교 사람이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혼배성사를 안 하면 세속적 결혼은 무효였다. 그런데 혼배성사는 남자도 가톨릭신자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부인에게 "평생 미안했소. 이제 혼배성사를 해드릴게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75년 8월 5일 이 두 사람은 미국인 변 신부의 집례로 상봉동성당에서 조촐하게 혼례를 올린다. 왠지 우리 가슴을 스산하게 만드는 눈물겨운 장면이다. 당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하여 눈을 붉히고 있었던 정보부 요원들은 이 일련의 행동을 방관만 하고 있었을까?

75년 8월 17일(일) 아침, 의문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장준하는 이날 등산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항상 같이 등산하던 친구들을 다 쉬게 했던 터였다. 안면은 있었지만 왕래가 뜸했던 이 두 사람은 버스까지 대기시켜 놓고 집요하게 장준하에게 등산을 강권했다. 그리고 평소 오른 적이 없었던 생경한 포천군 약사봉 코스를 올랐다. 그리고 장준하는 바위절벽과 절벽 사이를 뛰어넘다가 추락해 죽었다고 했다.

"내가 가봤잖아. 15m 절벽에서 추락해 죽었다는 사람을 뉘어 놓았는데, 안경도 손목시계도 그대로 있었고 도무지 아무런 외부찰상이 없었어. 피 한 방울 안 흐르고 시신이 멀쩡했어. 양쪽 팔에 멍자국이 있고 오른쪽 귀 뒤에 도끼로 얻어맞은 듯한 심한 타박상이 있었을 뿐이야."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다. 그 뒤 동아일보 성낙오 편집기자는 "실족사가 아닌 것 같다"는 기사를 실어 긴급조치위반자로 구속되었다.

오늘날 또다시 "장준하씨 사망이 민주화와 무관하다"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판결을 듣고 보니(본지 5월 22일 기사), 장준하 선생 묘소라도 찾아가서 사죄하고픈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