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모씨가 자신이 80년대 주사파의 총책으로서 조직원들에게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를 하게했던 장본인이라며 현역의원의 실명까지 거명하며 전향여부를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18년 유신통치가 10.26으로 끝이 나자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가 80년 광주항쟁으로 불타올랐지만 집권욕에 불타는 신군부에 의해 유혈진압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광주는 80년대 활화산과 같은 이 땅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였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학살도 마다않았던 것은 사실 친일세력들의 통치기반을 고스란히 물려받기 위함이었다. 이 현대사의 대 사건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외세, 그리고 민족의 분단이라는 화두를 일목요연하게 던져주었다.
80년 5월의 패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낭만적인 민주주의만으로는 철권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바로 대학생들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라틴아메리가든 제3세계 해방운동이 도움이 될까? 민중신학의 십자가를 붙잡을 것인가?
철권통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수단으로 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당시 대학생들의 심리적 상태였다. 그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핵심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일컬어 ‘운동권’이라했고, 지금은 386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의 중등교육과정상 철학적으로 천박한 인식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교육받은 대학생들은 복잡한 한반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명료하게(물론 편향되지만)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적대적인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전략전술을 제공하는 이념이 필요했다.
당시 대학가 서점은 이러한 사회과학서들로 넘쳐났다. 대부분이 금서목록이었고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 ‘이 책들을 읽고 북한에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라고 시작되는 진술서를 써야만했다.
아주 일천한 수준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이런 이념 때문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동구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전두환 정권의 말기적 탄압도 극에 달할 무렵, 한국의 저항운동은 더 이상 동구의 사회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우리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부 치열한 논쟁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소위 사회구성체논쟁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학원가에는 주체사상과 북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며 저항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던 분파가 있었다. 소위 주사파 NL세력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우리의 문제는 분단과 떼어놓고 사고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참고할 수 있고 손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여기에 주체사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외계인의 사상도 있었다면 차용했었을 것이다.
6월 항쟁은 이런 운동권들과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이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리고 직선제 쟁취라는 공동의 목표에 힘을 모았다. 철권통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감옥을 가려고 줄을 서있는 대학생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당시의 그 숱한 공안사건들과 젊은이들의 희생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과 운동권 모두 서로를 완화시켜나갔고 이 와중에도 각종 공안사건, 간첩단 사건은 심심치 않게 특히 대선을 전후해 나타났었다.
급기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DJ정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사건을 만나면서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그에 비례해서 운동권의 경직성도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제는 사회 각 부분이 이해관계 조정을 위한 싸움이 대부분이고 체제나 이념을 논하는 싸움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번의 소위 “386간첩” 사건도 과거와 같으면 남산지하실에서 온갖 매질을 당하면서 대형사건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수도 있었는데 뺨 한대 때릴 수 없고 야간구금 장소도 국정원이 아닌 서초경찰서로 법대로 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8-90년대에는 남산 지하실에 갇히면 서류상으로는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묵비권이 어디있는가. 묵비권은 곧 구타와 고문의 동기유발일 뿐이었다. 사실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와 고문을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그 숱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지 않았던가?
나는 가끔 절대 상상으로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상상해본다. 전두환이 29만원밖에 없다는데 우리가 당한대로 딱 하루만 하게 한다면 다 밝혀낼 수 있을텐데... 하는 정말 해서는 안되는 상상을 해 본적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8-90년 20년을 살았다. 그것은 일부운동권의 인생역정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겪었던 역사였다.
이제 뉴라이트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좋다. 주체사상을 신봉했고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했던 것이 잘못이란 생각이 들어 반성을 하든 속죄를 하든 전향을 하든 그것은 자유다. 이글을 쓰는 필자도 한 때 주사파로 분류되던 사람이었다. 그 대가로 4년 2개월을 독방에서 살고 나왔다. 그 숱한 날을 면벽으로 보내면서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살지 않았다. 80년 90년대를 살아오면서 곱씹고 도 곱씹고 잘잘못을 가려보고 반성하고 또 다른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비록 수감되어 있지만 촌음을 아껴 정진하며 살았다.
마르크스 주체사상의 한계와 허술함도 시대의 변화와 우리 인식의 발전으로 모두 정돈되었고 설령 그로인해 지은 죄가 있다 해도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또 다른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집안은 월남한 기독교가정이다. 사상적으로 말하면 반공반북의 원조다. 고등학교 때까지 반공글짓기 웅변대회의 단골선수였다.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학살할 때도 솔직히 ‘광주폭도들의 광란’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편향적 사고를 대학에 들어와서 분노와 함께 벗어버리게 되었다. 이 세상에 전두환 독재 세력보다 나쁜 집단은 없다고 생각했고 전두환이 나쁘다고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 되버리는 시대가 80년대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반공을 외치는 전두환이 싫어서 반반공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일천한 인식체계를 가졌던 대학생들로서는 다양한 이념, 사상을 갈구하였고 이는 전두환 세력에게는 금단의 열매였던 것이다. 만약 그런 시대적 고뇌와 아픔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학생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대학생이 80년대 학생처럼 살면 바보취급 받는 것 아닐까?
그런 시대를 넘기 위해 몸부림쳤던 386들은 성실히 성찰하고 각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그것을 무슨 지식인들의 투신이라면서 치기어린 옛날 시각을 되뇌이는 것은 사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뉴라이트의 또 하나의 아쉬움은 고해성사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이다. 잘못이 있었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 법을 어겼다면 응당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 종교적 죄악을 범했다면 참회의 기도를 하든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 된다. 나와 함께 했던 모든 386들은 이미 오래전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한계와 허술함을 서로 확인했다. 그렇게 대화하고 반추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평화로운 분단구조의 해소 등을 가지고 여러 가지 비젼을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아무런 제약이 될 수 없다. 또 대부분의 386들은 뉴라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깊이 신봉하지도 않았다.
전향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면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일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변화를 갖게되어 있다. 종교를 통해, 학문을 통해,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아니면 스스로 살아온 내력을 통해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수없이 전향하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것이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자 얼마나 싸웠던가를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그리고 어떤 사람의 사상이나 생각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표현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20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너 어떻게 변했는지 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천박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고해성사의 대상이 군사독재 세력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과거 친일이나 군사독재에 열심히 가담했던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나 그때 참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었네, 이제 보니 우리도 문제가 많았지.”라고 말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나도 독재와 싸우다 주체사상도 보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도 보았지만 다 시대성을 상실한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지난시절 안기부에 있었던 사람들과도 이렇게 대화하곤 한다.
진정 스스로 과거를 온전히 반성한 사람은 다시는 그 과거가 자신의 족쇄가 되지 않는다. 뉴라이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는 그런 반성이 제일 늦은 모양이다. 남들은 다 그렇게 과거를 내일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는데 아직도 전향 운운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뉴라이트 인사가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로부터 “언제 군사독재가 있었느냐?”고 항변을 받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과거를 계속 반성해야하는지 아니면 못난 과거가 너무 속상해서 헛발질을 계속하는지 이 또한 여간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 나도 우로도 치우쳐봤고 좌로도 치우쳐봤다. 한국의 분단 상황과 억압된 군사통치를 극복하기위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그런 나이가 되었고 시대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신장되어 이제는 그런 치우침이 필요 없다. 극단은 극단을 부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도 라이트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몸에 여러 가지 흉터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 흉터는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징표가 된다.
우리가 온몸으로 군사독재를 넘어 이만큼의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어오면서 금단의 열매도 따먹어 보았고 수많은 상처도 입었다. 온몸으로 그 터부를 돌베게 삼았기에 오늘의 이해수준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설령 일천한 인식체계와 포악한 정권에 대항할 수단으로 참고하거나 이용했던 사상이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부정해선 안 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몽매함은 어리석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반성이 친일군사독재세력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러 가지 오류를 감내하며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사상 이념적 오류가 있었지만 선진국의 절대조건인 민주화의 기틀을 만든 두 힘이 대한민국의 저력이다. 사회경제사적, 정신사적 성찰이 이제는 좀 품격 높게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빨갱이 놀음, 이념전만이 자신들의 과거를 합리화 할 수 있다고 믿는 old right는 결코 new right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슬픈 자화상이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그리고 당당히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하고 담대히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사람은, 그런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과거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러한 회개가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아직도 자신의 과거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뉴라이트는 진정한 ‘전향’이 필요한 듯 하다. 이미 모든 386은 젊은 시절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얻었던 상처들을 깨끗이 씻었음을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2006. 11. 6
한탄강가에서 이철우 |